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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늘 내 안에 계시는 나의 부모님下

기사승인 2017.06.14  10: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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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니스트 이동순 교수

7월 하순 가족들과 산으로 겨우 겨우 올라오신 어머니는 8월 초순 그 삼복더위 염천(炎天)에 몸을 풀었습니다. 그날은 음력으로 6월28일, 양력으로는 8월11일 금요일입니다. 고도가 높은 산중이라 무더위는 별반 느껴지지 않았겠지요. 필시 산지기네 집 아낙네가 어머니의 출산을 옆에서 도왔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부엌에서 가마솥에 물을 끓이셨을 것이고, 형과 누나들은 영문도 모르고 산길을 뛰어다니며 장난을 쳤을 것입니다. 마침내 병아리 같은 아기울음소리가 들리고 새로운 생명이 지상에 태어났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본인입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에도 국군과 북한군과 서로 맹렬하게 쏘아대는 대포소리와 기관포소리가 온통 하늘을 찢었다고 합니다. 그 무시무시한 전쟁의 포성 속에서 나는 태어났습니다.

▲ 어느 산지기집 사진으로 내가 태어난 집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이동순

그런데 절박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머니가 출산 직후부터 몸이 회복되지 않은 채 병세가 시름시름 자꾸 나빠져만 가는 것입니다. 그 앓는 산모에게 아기를 안겨서 젖을 물리게 할 수도 없고, 아기는 배고픔으로 줄곧 악을 쓰며 울어대기만 했습니다. 이때부터 젖배를 많이 곯았던 것이지요. 지금까지도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까닭이 당시 젖배를 몹시 곯아 그렇다고 아내는 늘 되풀이합니다. 그로부터 산지기네 집에서 약 석 달간의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여러 해 전 이곳을 일부러 찾아가 본 적이 있었는데요. 산지기집은 무너지고, 숲이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한때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듯 깨어진 아궁이와 구들장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덧없고 허무하기만 했지요.

북한군이 마을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은 고향집으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축해서 간신히 내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도 어머니의 병은 호전되지 않고 점점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속탈까지 나서 줄곧 설사를 하셨고, 온뭄은 점점 불덩이처럼 달아올랐습니다. 1951년 음력으로 5월 14일, 양력으로는 6월 18일 월요일. 나를 낳으신지 10개월 만에 어머니는 기어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향년 42세! 꽃다운 나이는 지났지만 한창 활기차게 살아갈 나이에 이게 무슨 변고에 횡액이란 말입니까? 제대로 즐거운 삶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제국주의의 압박과 시련 속에서 극도의 가난과 고통을 겪다가 기어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렇게 숨을 거두다니요. 게다가 전쟁 통에 낳은 막내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 6.25 당시 아들을 업고 고향을 떠나는 피난민 ©국가기록원.
▲ 6.25 전쟁 당시 수원 인근에서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공산군의 진격을 피해 황급히 남쪽으로 탈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서도 자나 깨나 어린 막내 생각으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젖도 못 먹이고, 배고파 우는 어린 것을 두고 차마 그 외롭고 힘들다는 저승길을 떠나지 못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어느 해 여름, 기공(氣功) 수련에 뜨겁게 몰입하던 적이 있었는데요. 새벽 두시 경이던가, 기이한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던 그날 임종 무렵의 광경이 마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생생하도록 가슴이 떨리며 무서움이 느껴지는 광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기둥에 이마를 기대어 흐느끼고, 형과 누나들은 어머니 머리맡에서 뒹굴며 울어대고, 윗목에는 어린 아기가 포대기에 쌓인 채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있습니다. 어머니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아버지를 당신 가까이 오게 해서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저 윗목의 어린 것은 금방 저를 따라 올 것이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위로 아이들은 계모설움 안 받도록 제발 잘 부탁드립니다.” 이 말씀을 이승의 끝말로 남기고 어머니는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에도 영혼이 차마 머나먼 열명길을 떠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말씀은 비록 그러하셨어도 어린 핏덩이가 눈에 밟혀 그저 막내 곁을 맴돌며 마치 살아계실 때처럼 이리 보듬고 저리 쓰다듬으며 그대로 남아계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머니와 내가
모자간의 인연으로 이 세상을
함께 살았던 시간이란
고작 열 달
무슨 볼 일 그리도 급하셔서 어머니는
내가 첫돌도 되기 전에
내가 땅에 두 발을 딛기도 전에
서둘러 가신 것일까
생각하면 때로
어머니가 야속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어린 핏덩이를 남기고 떠나실 즈음
어머니 심정이야 오죽 하셨으랴
사진도 한 장 없고
어찌 생기셨는지 얼굴조차 모르지만
그 어머니께서
늘 내 속에 와 계시고
또 자식 옆을 잠시도 떠나지 않으시며
살아 계실 때처럼 이것저것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나는 안다
-시 ‘어머니’ 전문

그렇지요. 이런 사연으로 해서 어머니와 나의 육신의 인연은 고작 10개월입니다. 배 속에서 열 달, 태어나서 열 달이니까요. 어찌 이렇게도 아쉽고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있을까요?

어머니는 활터 정자를 지나서 모실바우 옆 나정지 골짜기 위쪽 바람찬 산등성이에 묻혔습니다. 아버지는 이 지긋지긋한 고향마을을 한시바삐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 자식과 아내가 묻힌 곳에서 어찌 편한 마음으로 견딜 수 있었으리오. 늘 배고파 우는 젖먹이 막내를 품에 안고 아버지께서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비슷한 세월의 언저리에서 아기를 낳은 집을 찾아 젖동냥을 다녔습니다. 그 광경이 고소설 ‘심청전’에서의 처량한 봉사 심학규 모습과 다를 바 없었지요.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고향마을에 가면 여러 아주머니들이 나를 와락 품에 껴안으며

“네가 내 젖을 먹었던 나출이가 아니냐?”라며 반색하셨지요. 나출(羅出)은 내가 나실의 산지기집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아버지가 붙여주신 나의 아명입니다. 전쟁이 일어난 경인년(庚寅年)에 태어났다고 인출(寅出)이란 아명도 함께 불렀습니다.

▲ 중학교시절 대학노트에 가사를 적어서 이런 노래책을 만들었습니다. ©이동순

젖으로도 부족하면 아버지는 쌀과 말린 홍합을 곱게 갈아 부드러운 암죽을 끓여서 떠먹여주셨다고 합니다. 내가 열이 올라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면 아버지는 포대기로 나를 등에 업고 방바닥에 등을 구부린 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셨다고 합니다. 이 지극한 사랑과 정성을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으리오.

마침내 1953년 봄, 아버지는 어미 잃은 4남매를 데리고 대구로 나왔습니다. 아무런 삶의 방책이 있을 리 없는 고달픈 이농민(離農民) 가족의 초라한 행색이었지요. 대구의 시민운동장 부근 자동차정비공장 내부 허름한 방 한 칸이 새 보금자리였습니다. 백방의 노력 끝에 아버지는 전매청 창고지기로, 형은 행정서기 보조로, 큰 누나는 권련을 생산하는 현장노동자로 일자리를 얻어서 이름 그대로 전매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대구의 수창초등학교 뒤편 전매청 관사인 전매료(專賣寮)로 입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낡고 허름한 이층 목조주택입니다. 이곳이 바로 나의 소년시절 들판의 망아지처럼 뛰어 놀던 터전입니다. 거기서 초등학교 입학도 하고, 슬픔과 쓰라림의 많은 추억을 가슴에 쌓게 됩니다.

▲ 비행기의 삐라살포 ©이동순

당시 하늘에는 경비행기가 다니며 자주 삐라를 뿌리곤 했습니다. 높은 하늘에 뿌려진 삐라들이 반짝이며 지상으로 팔랑거리며 내려오던 광경은 소년들에게 하나의 멋진 환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그걸 서로 먼저 줍기 위해 이리저리 강아지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습니다. 그 삐라에는 대개 반공(反共)을 내용으로 하는 정치적 구호와 자유당정권의 정치선전이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삐라는 공중에서 해체되지 않은 채 덩어리째 땅바닥에 곧장 떨어지기도 했는데요. 그런 삐라를 주우면 거의 횡재(橫材) 수준이었습니다. 그걸 주워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아버지께 갖다드리면 아버지는 “화장실 휴지가 필요하던 차에 마침 요긴하게 쓰겠구나” 라며 반색하셨지요. 아버지는 UN이란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백동(白銅) 과도를 숫돌에 잘 갈아서 삐라를 잘게 네 등분으로 잘라 화장실에 걸어두셨습니다. 휴지가 따로 없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없는 소년시절의 애달픔은 이루 필설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형, 큰 누나가 출근하고 없는 집에서 나는 작은 누나랑 함께 지냈습니다. 외로움, 쓸쓸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적막한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 벽에 걸린 옛 시조 족자 ©이동순

바쁜 일과 중에서도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위해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고시조를 인쇄한 두루마리 족자를 여러 개 구해 와서 벽에 걸어놓고 아들로 하여금 따라 외우도록 했습니다. 송강 정철, 목은 이색, 야은 길재, 김종서, 남이 장군, 성삼문, 양사언, 황진이의 시조작품들을 그때부터 익혔습니다. 아버지가 한 줄을 읽으면 나는 뜻도 모르고 그냥 따라 외웠습니다. 말 그대로 구전(口傳)의 방식이지요. 그렇게 외운 시조가 다섯 살 무렵에 거의 30여 수나 되었지요. 전매료 이층집 방안에 모기장을 쳐놓고 더운 여름밤, 나는 아버지의 팔베개에서 시조를 외우다가 스르르 잠이 들곤 했습니다. 시조를 외다 보면 동촌의 공군비행장 쪽에서 밤하늘을 향해 쏘아대던 탐조등의 환한 불기둥이 줄곧 빙빙 돌아가던 광경이 보였습니다.

동네 공터에는 목재를 쌓아놓은 곳이 있었는데, 여름밤 주민들은 더위를 식히느라 거기 나와서 부채질을 해댔습니다. 그 앞에서 나는 다섯 살 소년으로 또랑또랑 여러 편의 시조를 외우곤 했습니다. 어른들의 칭찬이 은근히 듣기에 좋아서 나는 시조를 또 외우곤 했습니다. 이런 기억력이 작용한 탓일까요?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아버지가 틀어놓은 진공관 라디오에서 가수들의 노래가 들려올 때면 그것을 유심히 귀 기울여 듣곤 했습니다. 특히 여성가수의 노래가 나올 때면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저러할 것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아버지가 즐겨 듣던 1950년대 진공관 라디오 ©이동순

황금심, 신카나리아, 이난영, 장세정, 백난아, 이화자, 백설희, 송민도, 금사향 등의 노래가 나올 때면 내 가슴은 마구 달아올라 황급히 공책을 들고 와서 가사를 옮겨 적었습니다. 한창 총기가 있을 때 받아 적으며 바로 외웠습니다. 그렇게 3절 가사까지 익힌 노래가 중학교 2학년 때는 무려 470곡 가량이나 되었으니 참 맹랑한 소년이었겠지요. 대학노트로 빽빽이 적어서 무려 두 권이나 되었습니다. 어머니 때문에 이런 집착이 생겨난 것입니다. 나에게 늘 부족한 어머니를 채우느라고 형성된 버릇이지요. 그런데 그게 지금의 실버세대를 위한 각종 행사에 찾아가 즐거움을 주는 도구와 저력으로 활용이 되고 있으니 참 기이한 일입니다.

당시 나는 아버지 목의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요. 아마도 그곳을 은연중에 어머니 젖꼭지로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손톱으로 꼬집기도 해서 아버지는 몹시 아프고 성가시기도 했을 터이지만 묵묵히 참고 아들의 고약한 잠버릇을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당신의 목젖을 어미의 젖으로 알고 만지작거리는 막내의 애달픈 모습에 아버지 심정은 갈가리 찢어졌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어느 날 아버지가 새 아내를 들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로서는 아이들 입장에서 볼 때 계모를 들일 수가 없었겠지만 당신 삶의 여러 불편함을 감안할 때 재혼의 필요성이 절실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불과 40대 중후반의 남성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두어 여인을 들였는데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빚과 상처의 얼룩만 잔뜩 남겨놓고 둘은 독한 연기처럼 떠나갔습니다. 그 뒤로 다시 한 여인을 소개 받아서 아버지는 조강지처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습니다. 아마도 일찍 죽은 아내가 못 다한 시간까지 그렇게 덤으로 살아가신 듯합니다. 계모는 전혀 핏줄이 다르고 삶의 고락도 가족과 함께 하지 않았으므로 피붙이나 정 붙이의 인연이 아예 없습니다. 그저 시늉으로 부모자식의 연을 맺어서 살아갈 뿐입니다. 계모에게 만약 자신의 소생이라도 생기게 되면 그 가정의 갈등은 더욱 비극적으로 황폐하고 처연해집니다. 고소설 ‘장화홍련전’ 이야기의 원형(原形)은 고금을 막론하고 항시 동일하게 펼쳐집니다. 계모에게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했던 율곡(栗谷) 선생의 특별한 이야기까지 전해져 오지만 절대다수의 경우는 차별과 학대 속에서 전개되는 시련과 갈등의 시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온갖 곡절 속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오시다가 89세로 돌아가셨습니다. 큰 잔병치레 없이 아버지께서는 술도 식사도 항상 즐기며 사셨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에게는 늘 짐이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여든 후반이 되었을 때는 영면(永眠)의 시간이 가까워서 그런지 종일 주무시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돌연 뇌일혈이 와서 병실에 입원해 계실 때에도 대부분 혼수상태로 지내다 돌아가셨습니다. 가족들이 당번을 정해서 병실 침대를 지키는데, 나는 누워계신 아버지의 축 늘어진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면서 가만히 위로와 격려를 전해드렸습니다.

“이 손으로 평생 가족들을 먹이고 보살피시느라 노고 많으셨어요. 특히 일찍 엄마 잃은 저를 위해 이 손으로 품에 꼭 껴안으시고, 암죽도 끓여주셨지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제 속에 계실 것입니다”

나는 마치 기도문을 외듯이 입으로 나직하게 말씀드렸지요.

아버지는
하얀 병실 침대 위에서
덧없이 살아온
구십 평생을 낱낱이 헤아리시느라 비몽사몽

나는 그 옆에 엎드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를
밤을 새워 읽는다

어느덧 창밖이 훤히 밝아오고
어둠은 저편 산그늘 뒤로 슬쩍 숨어버렸다
푸른 새벽하늘에
문득 한 떨기 총총한 별이 떴다
어디선가 새로 태어날 생명이 목숨 받을 준비라도 하는가

그래, 세상은 어차피 이렇게 이어져가는 것
나는 힘없이 축 늘어진
아버지의 한쪽 손을 꼭 쥐어본다
-시 ‘새벽별을 보다’ 전문

아버지 만년(晩年)의 이야기입니다. 당신께서는 쓸쓸한 방안에서 늘 혼자 우두커니 누워계셨습니다. 새벽녘이면 라디오를 켜서 일기예보를 들었고, 자리에 누운 채 팔과 다리를 움직여서 운동을 하셨습니다. 잠시 마당에 나가서 빗자루로 한바탕 가랑잎이나 검불 따위를 말끔히 쓸어버리신 다음 다시 방안에 들어와 낮잠을 주무시거나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매일 정해진 일과였습니다.

간혹 무언가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아버님께서 일기를 쓰시던 모습이었지요. 아버님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할 때 책상서랍에서 이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내 중학교시절의 쓰고 남은 공책 여백 부분을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아서 철사를 꿰고 표지를 씌워 새 일기장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줄씩 쓴 일 년 열두 달 일기장의 내용들이 거의 동일했습니다. 도합 네 글자인데 전문은 ‘종일 본가(終日 本家)’였습니다. 간혹 이발, 목욕 다녀오신 기록들이 보이긴 했지만 절대다수가 ‘종일 본가’로 채워진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면서 나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남기신 일기장 한 권을 들고 왔다
모년 모일 ‘종일 본가’
‘종일 본가’란
하루 온 종일 집에만 계셨다는 이야기다
이 ‘종일 본가’가
전체의 팔 할이 훨씬 넘는 일기장을 뒤적이다
해 저문 저녁
침침한 눈으로 돋보기를 끼시고
그날도 어제처럼
‘종일 본가’를 쓰셨을
아버님의 고독한 노년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일부러 ‘종일 본가’를 해보며
일기장에 이런 글귀를 채워 넣던
아버님의 그 말할 수 없이 적적하던 심정을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 ‘종일 본가’ 전문

몇 해 전 서울 대학로의 어느 극단에서 나의 이 시를 표제로 노년층의 삶과 고독을 다룬 연극작품을 만들어 무대에 올린 적이 있었지요. 인터넷에도 많이 올려지고, 특히 병실 복도나 엘리베이터 벽에 붙여진 이 시작품을 자주 보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흐뭇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요즘 노년층의 정황과 현실을 다룬 것이었지만 공연을 관람하던 그날, 나는 아버지가 그 무대 위에 계신 듯한 착각이 들어서 한없이 푸근하고 행복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결코 아득한 곳으로 떠나지 않으셨다는 판단을 하게 되니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무심코 내뱉은 나의 헛기침 속에서도 아버님을 소스라치게 느낄 수가 있었으니 말이지요. 부모님께서는 진작 내 안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것도 모른 채 나는 부모님을 원망하고 허전함과 고독을 탄식했던 것이지요. 스스로를 깨닫지 못하는 그 꼴이 얼마나 어리석고 우매했던지 모릅니다.

부모님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이 부족하고 죄스러운 일이 많지만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 격동의 세월 속에서 저를 낳아주시고, 돌아가신 뒤에도 항상 제 곁에 머물러 계시면서 이날까지 살뜰히 보살펴주셨으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곧 어머니 기일(忌日)과 아버지 생신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정유년 어버이날에 이 막내아들이 올리는 눈물의 절을 받으셔요.

칼럼니스트 이동순 교수 sundayk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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