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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단가(短歌)로써 얻는 행복!

기사승인 2017.08.07  10:4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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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가요에 심취하여 살아온 지가 어언 30여 년이 넘었습니다. 어떤 좋은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면 거기에 식상하기 쉬우련만 가요에 대한 애착은 어쩐 일인지 점점 더해져갑니다. 이 무슨 조화일까요? 그 까닭이 무엇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가요라는 문화도구가 지니고 있는 삶의 함축적이고 내밀한 정서, 내밀하게 젖어드는 듯한 기이한 공감력, 가요공간을 통해 들여다보는 민족적 삶의 애련한 발자취와 역사의 향취 따위가 불가분의 매력으로 지속적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의 경우는 젖먹이 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이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는 어머니의 그리운 옥음(玉音)을 옛 여성가수 노래 속에서 필사적으로 찾으려고 더듬으며 살아오다 보니 오늘의 대중가요해설가, 대중가요연구가의 영역에까지 다다른 듯합니다.

그런데 저의 나이가 어언 고희(古稀)의 문턱에 당도하고 있는데요. 예전에 없던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악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갈수록 진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대학에서 민족문화연구소를 맡아 이끌 때 그 연구소 부설의 대학원 협동과정 한국학과에서 국악전공자들의 지도교수를 여럿 맡은 적이 있었지요. 그들과 자주 토론하고 한국의 전통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차츰 안목이 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장구, 소리북, 거문고 등 전통악기에 대한 호기심과 학습의욕이 솟구쳐 바쁘게 배우러 다니기도 했지요. 그러던 중 수년 전 안도현 시인의 초청으로 전라북도 전주에 문학강연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 한 젊은 부인네가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의 더늠 ‘쑥대머리’ 가사 전편을 주저 없이 자청해서 완창(完唱)하는 것을 보며 전주가 과연 판소리의 고장이로구나 라는 감탄을 속으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경험은 돌아오는 길에 문득 엉뚱한 착상으로 이어졌습니다. 판소리와 단가가 물론 호남의 것이긴 하지만 출신지역이 다르다고 못할 게 어디 있겠느냐는 판단이 들었고, 나도 한번 독공(獨功)에 독공을 거듭하여 대중 앞에 나아가 그간 쌓은 새로운 분야를 반드시 펼쳐보겠노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원래 독공이란 판소리 가객(歌客)들이 득음(得音)을 위해 토굴이나 폭포 앞에서 혼신의 힘으로 노력하는 발성연습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의 독공방식은 밀폐된 자동차 안에서의 연습입니다. 그날부터 유튜브(www.youtube.com)에서 녹음한 임방울의 ‘쑥대머리’ 전편 파일을 준비하고, 그것을 자동차에서 틀어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일단 굵은 글씨로 인쇄한 가사전문을 별도로 준비하고, 그렇게 주로 운전 중에 ‘쑥대머리’를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습니다. 만약 장거리 운행을 하는 일이 있을 때면 수없이 되풀이해서 듣고 따라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방법으로 4, 5백회는 훨씬 넘게 들었을 듯합니다.

 

그런데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쑥대머리’ 가사가 입에서 저절로 술술 풀려나오며 가락까지도 익숙하게 흥얼거려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후로는 마치 제가 스스로에게 구술시험을 치르듯 녹음파일을 끄고, 가사전편에 가락을 실어서 차근차근 불러보았는데 거의 틀린 대목이 없이 끝까지 불러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쁨과 감격이란 말로 이루 형언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소박한 자신감을 얻어 임방울의 그 전설적인 악곡 ‘추억(追憶)’을 연마했고, 이후로는 곧바로 ‘사철가’에 도전해서 가락과 가사 모두를 암기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한학자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전라감사를 지낼 적에 썼다는 ‘호남가’까지 모두 익혔고, 다음으로는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을 신명나게 입 시늉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럭저럭 레퍼토리가 어언 네 곡이나 되었네요. 앞으로는 ‘심청가’에서 앞 못 보는 소경 심학규가 엄마 잃은 젖먹이 딸 청이를 품에 안고 어르는 대목인 ‘어화 둥둥 내 사랑’과 또 다른 단가를 골라볼 요량이지요. 이런 시간들이 나는 너무 흥겹고 신이 나고 즐겁습니다. ‘쑥대머리’에서는 헝클어진 봉두난발(蓬頭亂髮)의 춘향이가 옥중(獄中)에서 서울 간 뒤로 소식 없는 이 도령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과 탄식을 담은 절절한 대목들이 가슴에 크게 사무쳤습니다. 특히 ‘간장(肝腸)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볼까’란 대목은 시적 표현으로서도 가히 발군(拔群)의 고전적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정별 후로 일장서를 내가 못 봤으니
 부모봉양 글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난가
 연이신혼 금슬우지 나를 잊고 이러난가
 계궁항아 추월같이 번뜻 솟아서 비치고저
 막왕막래 막혔으니 앵무서를 내가 어이 보며
 전전반측의 잠 못 이루니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
 손가락으 피를 내여 사정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볼까
 녹수부용으 연 캐는 채련녀와 제롱망채엽의
 뽕따는 여인네도 낭군 생각은 일반이라
 옥문 밖을 못 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겄나
 내가 만일으 님을 못보고 옥중고혼이 되거드면
 무덤 근처 있난 은 망부석이 될 것이요
 무덤 앞으 섰난 남근 상사목이 될 것이요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아무도 모르게 울음 운다
-‘쑥대머리’ 전문

가창(歌唱)할 때의 호남억양과 발음을 그대로 표기해 보았습니다. ‘추억’에서는 애인 임방울이 자신의 애인 김산호주(金珊瑚珠)의 임종 무렵에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가서 그녀를 부여안고 통곡으로 절규하며 부르는 절절한 가락이 느껴지지요. 이 노래에는 두 사람의 온갖 곡절과 애달픈 사연이 세밀하게 숨어 있습니다. 만남과 이별, 그리고 죽음이 둘을 갈라놓는 처연한 슬픔이 줄곧 사무칩니다. 시종일관 계면조(界面調)의 비통한 창법으로 부르는 이 노래는 듣는 이의 가슴을 적시고 깊은 슬픔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경험하는 슬픔은 우리의 삶을 더욱 큰 슬픔으로 함몰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삶의 묵은 찌꺼기를 시원하게 청소해주면서 신선한 생기로 흘러넘치게 합니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행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그리 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 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난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 속에 들어서도 나는 못 잊겄네
 원명이 그뿐이었든가 이리 급작스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추억’ 전문

확실한 작가를 확인할 길 없는 ‘사철가’는 늙어가는 인생의 처연함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교훈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단가가 중국의 인물이나 고사를 엮어 사설을 짜는 데 비해 이 단가는 대부분 평이한 우리말로 엮어져 있고, 약간의 한시 구절만 인용하고 있지요. 꽃, 녹음, 황국 단풍, 백설 등을 보면서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느끼는 감상을 쉬운 일상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비교적 근래에 나온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작가나 창작 연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일제강점기 정정렬(丁貞烈, 1876~1938) 명창이 「사절가(四節歌)」(Victor KJ-1019)를 녹음한 적이 있으나 아직 음반이 발견되지 않아 이 곡과 동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근래에는 김연수(金演洙, 1907~1974)가 녹음한 「사시풍경(四時風景)」(1969)이 있으므로 현재는 그가 이 노래의 윤곽을 짠 것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가사 전체를 훑어보면 사계절풍경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느끼게 되는 인생의 무상함이 실감나게 담겨 있습니다. 시작 대목이 “이 산 저 산 꽃이 피면”입니다. 이 노래에서 가장 가슴을 크게 울리는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이 모두가 백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의 만반진수(滿盤珍羞)는 불여(不如) 생전에 일배주만도 못하느니라
 세월이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사철가’ 부분

‘인생이 모두가 백 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이란 대목에서 내가 살아온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들의 내용과 빛깔이 너무도 실감나게 느껴져서 숨이 가빠집니다. 내 앞에 다가오는 시간들을 최고로 즐겁고 행복하게 누리는 것이 생존의 비결이라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삶이란 줄곧 서운했던 일, 인간에 대한 미움과 분노, 고통과 절망, 좌절과 갈등에 억매여서 부자유의 상태로 헛되게 낭비했던 시간이었던가를 소스라쳐 반성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은 지난날 ‘행복론(Propos sur le bonheur)’이란 저술을 통해 과거에 억매이지 말고 지금 당장 내 눈앞의 현실에 주목하라는 가르침을 남긴 적도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내 앞의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바로 그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아름다운 단가(短歌) ‘사철가’는 그 어떤 철학서적보다도 더 확실하게 일깨워줍니다.

보통 단가는 긴 분량의 판소리에 들어가기 전 목을 푸는 의미로 부르는 5분 내외 정도의 노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현재 불리고 있는 단가의 수가 그리 많지 않으나 그것이 주는 매력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느껴볼 도리가 없습니다.

국곡(國穀) 투식(偸食)허는 놈과
 부모형제 불효하는 놈과
 형제 화목 못허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 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여 앉아서
 한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사철가’ 부분

이 단가의 대목 대목은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려줍니다. 인용문에서 ‘국곡(國穀) 투식(偸食)이란 부분을 뜯어보면 참으로 놀라운 현재적 의미로 되살아납니다. 국곡이란 바로 나라 경제가 아니겠습니까? 투식(偸食)은 국가와 관청의 돈이나 곡식을 훔치는 못된 부조리, 즉 관리의 악질적 부정부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최근 수년 간 우리는 얼마나 국가경제의 근간을 송두리째 썩게 만들었던 부패한 정권의 ’국곡투식‘ 때문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치를 떨어야만 했던 것입니까? 가족 간의 불화와 불효도 부정부패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비판의 표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을 좌중의 권주가로 사용할 때 그 흥과 신명은 한층 달아오를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단가 ‘사랑가’는 이 도령과 춘향의 짜릿한 사랑놀이 대목으로 어찌 그리도 우리를 흐뭇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넘실거리게 하는 것인지요? 독자 여러분께서는 ‘사랑가’의 이 흥겨운 리듬을 내 삶의 불쏘시개로 써보실 생각은 없는 지요.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이이이이 내 사랑이로다 아내도 내 사랑아” 춘향에 대한 연정(戀情)의 도가니에 흠뻑 빠진 이 도령은 너무도 어여쁜 춘향의 모습을 이리저리 감상하며 즐기는데 그 살뜰한 대목이 얼마나 율동적이며 어깨춤을 절로 나는지..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 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아마도 내 사랑아
-단가 ‘사랑가’ 부분

가슴이 답답하거나 울적한 기분일 때 ‘쑥대머리’ ‘추억’ ‘사철가’ ‘사랑가’ 따위의 격정적 단가를 신나게 목청껏 부르고 나면 희한하게도 꽉 막힌 속이 후련하게 뚫려서 소통되는 느낌을 얻습니다. 약 3분 내외의 분량인 대중가요에 비해 단가는 5분 내외의 다소 긴 호흡으로 가사를 음미해가며 즐길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ㅁ, ㄴ, ㅇ 등의 유성음(有聲音)이 들어가는 대목을 부를 때 입과 코에서의 그 공명음의 진동과 파장이 두뇌와 몸 전체에 골고루 전달되어 몹시 기분이 쾌활해지고 긍정적 사고를 갖게 되는 변화까지 경험하게 되지요. 그런 효과가 어디 단가 하나뿐이겠습니까? 삶의 주변을 자세히 돌아다보면 변화의 계기는 얼마든지 수두룩하게 널려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노래, 모든 음악은 만민(萬民)이 함께 공유할 수 있으며 행복감까지도 얻을 수가 있으니 음악이야말로 만국공통의 언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시간, 그리고 숨 가쁜 세상살이의 일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너무 퍅퍅하고 가파르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겨를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삶에서 즐거움을 얻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자세와 선택, 그리고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께서는 더욱 음악을 가까이 사랑하고 즐기면서 여러분 앞에 다가온 시간을 활기차고 그윽하게, 또 기쁘고 행복하게 바꾸어 가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문학평론가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영남대 명예교수

 

이동순 sundayk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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